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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강가

은행나무 골목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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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전통 한옥 마을에 이웃한

풍남동의 은행나무 골목 교수님댁에서

나는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넓은 골목길 무성한 탱자나무 울타리가 끝나는 곳에서

사립문을 열고 들어 서면

한 켠으로 긴 넝쿨장미 담장을 따라 걸어 들어 가야

본대문이 나타나고,

본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건

낮은 석축으로 둘러 싸인 앞 정원과

그 정원에 피어있는 갖가지 꽃들과 정원수들 이었다.

 

그 정원수들 중에는

키가 큰 향나무와 목련, 후박나무 그리고 석류나무 등이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목단, 철쭉, 작약, 국화 그리고 장미꽃 나무 등이

봄, 여름, 가을에는 예쁜 갖가지 색깔의 미소로

그리고 이 겨울엔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솜사탕 같은 미소를 보내왔다.

 

그리고 골목길 쪽의 탱자나무 울타리와

교수님이 서재겸 사랑방겸 침실로 사용하는 별채 사이의 정원에는

50여종이 넘는 장미나무 수백 그루가 거의 반절을 차지하고

나머지 공지는 교수님의 정원수 묘목 작업장이었다.

 

진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 법대를 나오신 교수님의 집안은 전라남도 해남이다.

슬하에는 나 보다 세살 아래의 딸과

그 아래로 아들 둘이 있고 막내 딸이 있어 네명의 자녀를 두셨다.

 

부인은 일본에서 의예과 신입생 이었을 때 해방을 맞았고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면서

당시의 교수님을 만나 귀국후 바로 결혼을 하셨다.

 

두 분은 열두살 차이라서 똑같이 호랑이띠였고

자녀들중 호랑이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두명이 더 있어

이 집안은 호랑이띠들의 집합소 처럼 되었다.

 

교수님은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신 탓이었을까?

유난히 정원수와 화훼 가꾸기에 정성을 다 하셨고

그 때문에 울안은 언제나 수목원이나 화훼농장 같은 분위기였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이 집안에는 김장과 더불어

연례행사 처럼 치르는 한가지 특이한 정경이 벌어진다.

 

바로 향나무 묘목심기,

그리고 장미나무등의 접붙이기이다.

 

향나무 묘목심기는

손가락 길이의 향나무의 작은 가지를 잘라서

그 잘린 부분에 착근촉진제를 발라

잠시 약간의 흙으로 싸두었다가 밭에 심는 작업이었고

장미나무 접붙이기는

여러 종류의 장미꽃 나무의 가지를

역시 손가락 크기로 잘라서

비교적 생명력과 내한성이 강한 찔레나무의 뿌리에

엇비슴히 접목을 하여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서

강하고 아름다운 장미나무와 꽃을 탄생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묘목작업이 시작되면 온 집안이 어수선하고

일약 활기를 띄기도 하지만

때로는 며칠 씩 밤 늦게 까지 작업이 계속되어

피로가 누적되기도 하였지만 모두들 열심이었다.

 

이렇게 작업이 완성되어 착근이 된 향나무의 묘목들은

이듬해에는 착근이 완료되어 시장으로 팔려 나갔고,

장미나무들은 정원의 작업장에서 두어 해 더 시간을 보낸 뒤에

살아 남은 것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거나 팔려나간 것 같다.

 

또 교수님은 국화중에서도

한 송이가 양손바닥을 편 만큼 큰 국화를

이른 봄 부터 가을 까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아주 정교하고 순결한 작품으로 만들어

국화 전시회장에 출품하곤 하셨는데

지난해에도 코엑스 국화 전시장을 두루 돌아 보았지만

교수님의 정성이 베인 그런 화사하며 섬세하고 순결한 모습의 국화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교수님은 또한 악필(握筆)의 대가였던 剛巖 송성용옹하고도 친분이 두터우셨고

거문고에도 일가견이 있으셔서

그 집안에서는 가끔

교수님의 거문고와 막내딸의 가야금 소리가 어울려

학이 춤을 추는 형용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이 겨울이 깊어가니

나는 또 그녀 생각이 난다.

 

눈내리던 어느 깊은 겨울 밤

고 3학년 이었던 그녀가

책가방을 던져 두고

사립문을 열고 나가며 눈위에 남겨진 나의 발자욱을 따라

나를 찾아나섰다가

한옥마을 부근의 오목대(전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공원) 벤취위에 쌓인 눈위에다

* 선생님!SY 여기 왔다 갑니다* 라고 써놓고 왔다고 하던 그녀.....

 

그때 나는 눈 내리는 철길을 따라 한 없이 걷고 있었는데.....

 

나에게 생애 처음으로 입맞춤의 추억을 남겨놓은 그녀!

 

교수이셨던 아버님이

창호지로 바른 방문 밖 마루에

손님과 같이 담소를 나누며 앉아 계셨는데도

조마조마한 마음에서도 꿈속같은 입맞춤의 황홀경에 취해서

서로 떨어질 줄 몰랐던

열 여덟의 그녀...

그리고 스물 한살의 나....

 

그 은행나무 한옥집 ....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서

어느 추운 겨울,  세상이 모두 잠든 날 밤

그녀는 말했었지

*선생님, 제가 그렇게 좋아요?*

 

그리고 말없이 어둠속에서 일어나 미닫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마당의 수돗물로 간단히 목간을 하고 들어 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똑바로 누워서

나에게 공을 던지는 그녀.....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옆에서 자고 있는 막내 딸이

혹여 깨어 있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에

나의 온 신경은 세상 끝까지 뻗쳐 올라

옴짝달짝 못하고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멀리 아득히 어둠을 가르며 울려오는 기적소리가

나의 모든 욕망의 찌꺼기들을 날라다

청청히 빛나는 은하수 깊은 곳으로 쏟아 붓고 있었다.

 

교수님은 강의를 위해서

일본의 법률서적을 많이 참조하셨는데

그럴 때의 교정은 꼭 나에게 부탁하셨다.

 

그러나 좋은 추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해였던가.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공포를 앞둔 어느 시기에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채에 모여서

교수님의 유신헌법에 대한 홍보강의를 듣고 가기도 하였으니

그때의 교수님은 시쳇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어의를 통감하셨던 것 같다.

 

법률학자라면 그누가 보아도 악법임이 틀림없는

그 유신헌법을 홍보하지 않으면 안되셨을

박정희 정권의 그 시절 그 사회상은

지금 또 다시 망령 처럼 되살아나서

중고교 근현대사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억지 강연으로

약간의 색조만 바뀐채 현 교육사회에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전주의 은행나무 골목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교수님의 그 부연기와집과 탱자나무 울타리는 나를 기다려 줄 것인가?

수염을 길게 늘어 뜨린 악필의 대가,

剛巖 송성용옹의 혼은 어느 한옥의 문지방 위에서 이 겨울을 날까?

그리고 내가 가르치던 그 오줌싸개 막내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침 마다 골목을 쓸 때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주던

그 아릿다운 그림쟁이 소녀는?

 

지금은 모두 은하수 보다 더 깊은

내 마음의 심연 한켠에서 잠자고 있었구나.

 

사계절이 번갈아 오듯

시절은 돌고 도는 것.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절규와 아픔을 사뤼어야

봄이 오려는지.

 

정치, 경제,환경, 사회적으로

모두 고단한 세월의 문간에서

나는 혼신의 염원을 담아 두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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