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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강가

당황스런 제안 ~

 

대학 강의가 시작되기 전

아침 1시간씩 TESL이라는

영어 회화 시간이 전교생을 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교수님은 영문학과 최**라는 여자 교수님이었는데

당시에 50대 후반 정도의 다정다감하고

아주 섬세한 여성미를 풍기는 분이셨다.

 

교실은 1곳 뿐으로

전체 수강생이 4~50명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학구열이 대단한 학생들로 구성되어서 인지

학습 분위기는 진지하고 열기에 휩싸였다.

 남녀 학생의 비율은 거의 반반이었으나

영문학과 학생들이 전체의 3분의 1정도로 많았고

나머지는 타 학과 학생들이었다.

 

교수님은 항상 책 외에

작고 예쁘장한 지휘봉과 

휴대용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셨는데

책 내용을 녹음한 것을

가끔 들려주시곤 했다.

어느날 아침...

막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주섬주섬 책을 챙겨 

자리를 뜨려는 순간에 

한 여학생이 교수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큰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저 저 학생하고 녹음을 좀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주세요"

 

말을 꺼낸 여학생을 보는 순간

나는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여학생은 바로 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실안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그 여학생과 나에게 모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바보 처럼 그저 당황스런 모습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라도 해 놓았던 듯

태연하고 당당하기 까지 했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기회를 갖도록 해요!"

갑작스런 그 여학생의 제안이 좀 무모했었던 듯

교수님은 그렇게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나 역시 이 돌발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대책이 서지 않았는데

다음에 하자는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 휴! -하고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그 여학생은 국문과 학생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기 몇달 전

교정의 작은 소나무밭 벤취에서

무슨 책인가를 읽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내가 말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후로 그녀와는 대화가 없었고

다만 그녀가 학교 축제 때

합창단의 맨 앞줄 한가운데서

정말 장밋빛 볼을 하고

멋있게 노래를 부르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뜻하지 않은 일종의 프로포즈를 받은 느낌이었다.

 

싫지는 않았지만

너무 과감한 대쉬에

나도 몰래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던 나 ...

 

너무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

청춘의 감정은

그 어느 학생들과도 다름이 없었겠으나

한 발짝도 옆길로 내 디딜 수 없었으니

나의 감정은 그저 회색빛에

철저히 갇혀 있었던 셈이다...

 

나에게 또 그런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그려보는

그녀의 모습이

비내리는 창가에 자꾸만 오우버랩된다. 

 그로 부터 수년이 흐르고...

 당분간 몸을 담고 있던

예식장 사무실에서

나는 배우자와 함께 앉아서 결혼예약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접했다.

그러나 나와 그녀 사이에는

잔잔한 미소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그 얼굴...

그 이름...

라** !

 

부디 행복하기를 ~

 

18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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