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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서

언론의 역할

 

 

<2018 - 10 - 양폭산장에서>

 

어느 날 아침 나의 작은 가게에

편지봉투 하나와 신문 한 부를 손에 든 노신사가

겸손한 미소를 먹음고 친근한 자세로 들어선다.

 

그는 조선일보 홍보원이었다.

봉투에는 5만원이 들어 있었고,

지금 내가 구독하고 있는 경향신문 대신에 조선일보로 대체하면

5만원 + 1년간 신문을 무료로 제공해준단다.

 

하지만 나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에는

조선일보나 한국일보, 동아일보등에 친숙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

언론검열과 언론통폐합을 거치는 과정에

언론과 정권의 유착관계가 깊어지면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게재하면

달콤한 선물이 주어지는 것에 길들여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좋아 했던 신문들중 일부에선 

색깔이 퇴색하거나 향기가 사라지고

지독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한국일보는 제외)

 

이 즈음 일부 양심을 앞세워 반기를 든 용기 있는 기자들은

그들을 억압하고 핍박했던 신문사에서 퇴출되거나

스스로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중 많은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후원자들의 모금에 힘입어

1988년에 "한겨레신문"이라는 국민(주)신문을 창간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경향신문과 더불어 정의(正義)라는 심장을 달고,

정권과 유착한 무지막지한 흉기로 무장한 몇몇 신문사들 사이에서

어렵사리 제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내 겪어 온 바로는

역대 대통령중에서 제일 순수하고

서민위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던 노무현 대통령....

 

그는 대통령직에 오르자

검.경과 정보당국, 국세청 그리고 언론을 통제하지 않고

거의 자유방임 상태로 이들 기관과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은 각 분야에 깊숙히 뿌리를 내린 보수세력의 공격을 받아

탄핵의 경지에 까지 몰리며

정말 어렵사리 국정을 수행하다가 가까스로 임기를 마쳤다.

 

이때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소위 조.중.동.이라 불리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들의

노골적인 노무현대통령을 그 직위에서 끌어 내리려는 공격은 실로 가관이어서

옆에서 지켜보기가 너무 안타깝고, 그들의 수작이 너무 가증스러워

신문에 대한 불신으로 내 마음 조차 평정을 잃은 듯했다.

 

그런 와중에 이명박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대선 기간중 조중동은 은연중에 여론조작을 감행하였고,

대통령이 된 이명박씨는 대표적인 국영방송국인 KBS사장에게

엉뚱한 죄목을 덧씌워 그를 사장직에서 불명예 퇴직시키고

입맛에 맞는 인물을 사장 자리에 올렸다.

그리고 자기 대선 승리를 위하여 공헌한 댓가로

조중동에게 각각 *종합편성방송국*이라는 선물을 한아름씩 안겼다.

마치 그의 건설동지들에게 4대강 이권을 한 구간씩 떼어주듯이 ....

 

그리고 그는 노무현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사정당국과 언론과 재벌을 완전히 장악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그 친밀한 밀월관계는 군사정권 때 부터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어 온 관계였지만 ......

 

그런 와중에 MBC에서 광우병에 대한 취재가 있었고

그 취재를 시청한 국민들의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 목소리들이 곧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판단하고

*PD 수첩*담당자들을 징계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팀에선 무혐의로 결론 내려진 상태에서

대검과 법무부의 강압을 거부할 수 없어 유죄로 선회하게된 광우병 사건....

여기에도 당시 청와대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광우병 시위로 인해 곤욕을 치른 이명박정권은

공영방송의 또 다른 한 축인 MBC를

자기의 측근인사를 사장에 임명함으로써

마침내 MBC마저 접수하고야 만다.

 

이리하여 조중동등 거대 일간지와

이들에게 전리품으로 주어진 종편방송들의 막강한 힘은

그들을 뒤에서 보호해주고 있는

살아 있는 정치권력과 어우러져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위치를 점하게 되어

그들이 사회에 끼치는 폐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전 방송에서는

단 한명의 민원인이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소지가 있는 사안이라면

일일이 방송에서 이를 소개하고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MB정권 어느 시점인가 부터 갑자기 모든 방송뉴스에서

몇백명이건 몇천명이건 그 대략 인원수만 알려주고,

예전 처럼 그 시위의 주체와 내용과 그 이슈에 대해서 함구해버렸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고

갑자기 감옥에 갇혀 버린 듯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것은 단 한명의 *소리*라 할지라도

전 국민적인 *소리*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변모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광우병보도 파문 직후로 여겨진다.

 

 신문이 되었건 방송에 있어서건

그들의 생명은 바로 정의와 공정성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두드러지게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던 시기는

총선시기와 박근혜후보와 문재인후보가 맞붙은 대선전 시기였다고 본다.

물론 MB정권 시절이다.

 

그 선거전의 영상들은 대부분이 편집과정을 거치는 동안

당시 여당 후보의 영상이 방영될 때에는

밀도감 있고 활동적으로 보이도록 편집하고,

야당 후보들의 현장을 방영할 때에는

어딘지 엉성하게, 그리고 어느 한쪽 구석을 볼품없이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런 영상을 대할 때 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 될 한국 언론의 현주소가 너무 안쓰러워서

한 없이 슬퍼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현 정권을 너무도 심하게 흔들어 댄다.

조금 모호한 사안이 있으면

이를 괴담 처럼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각색을 하여

실제로는 아닌데 꼭 진실 처럼 요리 조리 꿰 맞춰서

요상하게 현 정권을 공격하며 흔들어 댄다.

마치 노무현대통령이 있지도 않은

*고급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식의 음모론적 기사들 말이다.

 

어쩌다 그들의 사설이나 논평 또는 시사를 다루는 TV를 보면

은연중에 그들의 의도되고 계획된 현 정권에 대한 깊은 불신앞에

서 있슴을 감지하게된다.

언론이 정말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음식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신앙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적 의지처를 마련하 듯

언론을 통하여 이웃과 소통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근원적 힘인데,

그 근원이 찌부러져 있다면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 개개인인은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고 우리 자신을 정립할 수 있을까?

 

지긤이 바로 *언론의 대변혁*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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