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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대성산의 추억

 

28982

 

1970년 6월 어느 날 오후

강원도 전선에 배치될 103보충대원 2000여명은

전차대원이 될 기갑학교 졸업생인 우리들 16명을 선두에 세우고

춘천강변으로 몸을 씻으러 간다.

 

도로가 포장이 안되고 자갈밭 그대로였으나

다행히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아 가뭄속인데도

먼지는 별로 일어나지 않아 큰 고통은 없었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꼭 패잔병이나 노무자 처럼 보이는 후미 그룹이

"선두 좀 천천히 가라!" 라는 등의 고함을 자주 질러댔으나

우리는 잠시 속도를 늦추는 듯하다가 시간이 조금지나면

습관데로 저절로 다시 속도를 내서 행군하곤 하니

그런 고함소리와 행군 속도는 반복적으로 일어날 뿐이다.

 

그리고 가로수가 양옆으로 가지런히 늘어 선 자갈길 도로를  

4열 종대로  빽빽히 메우며 행군하다가

전면이나 후면에서 차량이 나타나면

바로 앞 까지 와서 멈춰서야 구령에 의해서 한쪽면으로 비켜서는 탓에

차량들이 우리들과 마주치면 상당히 곤혹스럽고 미웠을 것이다.

 

이 처럼 춘천 강변으로 나들이 목욕을 나오기 전

각양각색의 훈련을 마친 훈련병들의 집합소에

뭔가 이벤트를 만들어 활기를 불어 넣을 양

103보충대 2000여명의 대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103보충대 부대장의 명에 의해서

포병학교 졸업생들과 우리 기갑학교 졸업생들간의 격구시합이 이루어졌다.

 

광주 상무대에서 울타리를 이웃해 있으면서

주일 마다 같은 시각에 상무대 목욕탕을 이용했던 우리가

뜻밖에 강원도 103보충대에 와서야

분위기 쇄신용 이벤트 상대라니 ........

 

상무대 목욕탕, 그 짧은 자투리시간에 

그들은 우리를 향해

이구동성으로 하나 같이 말했었다.

"야! 기갑학교 쪽 하늘만 바라보아도 꼭 지옥 같드라."라고

 

그런데 막상 이곳에서 이렇게 맞붙어 보니

정말 싱거운 맞상대였슴이 곧 밝혀졌다.

무려 10:0 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입대할 당시에는 없었던 대성산회관

병사들의 휴게소 겸 가족 면회소  같아 보인다.

~~~~~~~~~~~~~~~~~~~~~~~~~~

다음날 아침

상무대에서 부터 103보충대 까지 함께했던

16명의 우리 일행은

언제 만날 기약이 없슴에 가슴 아파하며

강원도에 산재해 있는 각 사단의 전차중대로 흩어져 갔습니다.

 

나는 전차병으로서는 단신으로 야전 백(떠블 백)을 걸머지고

신입사병을 이곳 XX사단 보충대로 실어 나르는 트럭에 짐짝 처럼 실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하며

고향에서 멀리 떠나 와 있슴을 실감케하는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달리는 자갈길 북측으로는

그 지난 해(1969년)에 청와대를 급습했던 북한 김신조의 신드롬 탓이었던가

1000여 미터 높이 산줄기의 8부 능선을 따라

하얗고 굵은 목두리를 두른 듯한 신작로와

촘촘히 손에 손을 맞잡은 벙커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년병 처럼

위험스러웠고, 또 나에게 그만큼 위협이 되었습니다.

 

인간에 의한 환경과, 인간들의 마음과 마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철원평야 이곳 저곳에서는

철원평야의 대표적인 철새인 큰독수리가

겨울을 나기 위해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며

자연에 대한 감사와 평화의 시간을 펼쳐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대성산회관에서

 

제가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만 해도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이라는 어마 어마한 위기상황 때문에

그 전 해 부터 전역을 해야 할 선배들이 제대를 못하고

1년 이상씩이나 발이 묶여 있을 뿐 아니라

저기 산줄기 따라 새로 생긴 도로와 이어진 벙커를 만드느라 초죽음을 당하면서

36개월이나 있다가 힘들어 하며 전역을 해 나가곤 했었습니다.

그중에는 월남전에  참여했다가 귀국하여

이같은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 처한 선임자들도 많았습니다.

 

정말 고마운 선배 장병님들!~~~~

 

등반에 함께 참여해 주신 님들!~

 

40년만에 처음 찾아 온 나를

안내해 준 고마운 인연의 안내병들 !

나의 후배 전차병들이기도 하죠!~~~~~

 

내가 군복무를 하던 당시와는

전차중대의 위치가 판이하게 다르군요....

 

우리가 근무할 때는 "보. 전. 포" 합동훈련 이라 하여

보병과, 전차병, 그리고 포병부대가 함께 이웃하여

오늘 처럼 영하 10도 이하의 추운 날씨에도 합동으로 훈련을 하였으나

지금은 기계화부대라는 편제가 생겨

훈련의 양상이 많이 변했겠죠?

 

들머리가 시작될 때는

날씨는 맑았고 바람도 잠잠했습니다.

 

대성산 산행신청 인원이 무려 50명이나 되어

좌석이 모자라 대장님들은 거의 통로 보조의자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또한 산행신청 마감을 분명히 공지하였는데도 억지를 부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가는 내가 미안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어찌하랴,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어쩌면 앞으로 내 일생 동안

다시는 찾아올 지 모르는 이곳을 앞에 두고 !~~~

 

내 추억의 산행길에

고운 미소로 동행해 주시는 님들이 있어 다행입니다.

 

아무리 궂은 일이건, 어려운 일이건

이렇게 고운 미소로 대해 준다면 통하지 않을 일이 없을 것 같군요.

 

남남서쪽에 있는 복주산

 

대성산 부근에는 2개의 복주산이 있는데,

조금 가까운 거리에는 남서쪽으로 1057M의 복주산,

그리고 조금 먼 거리에는 남남서쪽에 있는

대성산과 높이가 비슷한 1152M의 복주산이 그것이랍니다.

 

어림잡아 몇십 미터는 쌓였을 터이고

기온도 섭씨 20도c 이하로 몇번을 내려 갔을 법한 이곳에서

아직도 이처럼 고운 미소의 흔적을 보여 주다니 .......

 

고맙고 또 아름다워라....

황량한 이겨울....

내 추억의 길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이처럼 내 가슴과 추억의 울림을 전해듣고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지키고 있는그대여,

 

내 삶의 보호자이며 증표인 그대여!~~~~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보니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복주산 인 듯하고,

아직도 이끼나 풀이 자란 흔적이 없는 신작로 주위를 보니

최근에 개통된 신작로 인 듯하군요.

 

그리고 예전에 내가 군복무를 했을 당시에는

능선을 따라 오르는 이런 평범한 오름길이 아니었고

계곡을 따라 오르는 가파른길이었습니다.

 

 

멀리 공군 레이더기지와 기상관측소가 올려다 보입니다.

 

1년 6개월 동안의 군복무(의가사 제대) 중에

1년 2개월을  지냈던 이곳 대성산에서

그 정상에 오른 적은 단 한 번 밖에 없었습니다.

전차중대는 이 산의 계곡 거의 제일 아래에 있어서

일반 1개 대대의 보병 병력이 관할하는 영내를 통과해야하고

이 관할 사단의 유격대를 또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사적으로 몇명이서 대성산 정상을 방문했었는데

그곳에는 특별한 군사시설이 있었다기 보다

그 당시 일정한 군시설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에서

미국과의 협조에 의해 그 정상에 최신 군사 관측및 필요시설을

설치하기로 양해하여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에는 외부 구조물들은 이미 건조가 되어 있었고

그 구조물을  관리하는 공군 수명이서 독서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등

자유로운 영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교육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교육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군요.

~~~~~~~~~~~~~~~~~~~~~~~~~

그리고 정상은 아니래도

중간 까지 한 번 다녀 온 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전차중대에 합류한 첫 해

화목(火木)이라 불리는 겨울 내무반 건물 연료용 땔감을

톱으로 베어서 가지고 내려 오는 일인데

추운지방, 특히 대성산 처럼 추운 강원도의 고지대나 계곡에선

겨울을 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이기도 합니다.

 

화목작업에 한 번 따라 나갔다가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아주 녹초가  되어 돌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올라 오는 곳곳에 이렇게

제설작업을 위한 장비들이 잘 정비되어 있는 걸 보니

눈이 왔을 때의 일사불란하고 힘차게 눈을 치우는 모습들이 눈에 선 합니다.

 

마침내 40여년 만에 대성산의 정상에 도착합니다.

오늘 내가 제일 염려했던 1개월여에 2회에 걸친 뇌수술을 받고 퇴원한지

겨우 열흘 밖에 안되었지만 이렇게 잘 마무리되어

대자연의 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감사드립니다.

40년전 그 날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오며

앞으로도 자연의 질서 안에서

그 한 부분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만족하게 하소서!~

 

육사시절에 올랐다가

22년 만에 대령의 직책으로 다시 이곳을 찾았던

한 자유인이 감회에 젖어

그 동안의 꿈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네요.

 

 

 

 

 

일찍 오르셨다가 저 처럼 늦은 회원들을 기다리시느라

추운 기온과 세찬 삭풍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얼굴 까지 가리는 고초를 겪고 계시군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대장님!~~~~~

 

관측소가 있는 이 대성산 정상 부위는

상상하기 힘든 강추위와 삭풍이 지배하고 있어

오래 머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리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던 순간 순간들은 

짙은 그리움으로 푸르러버린 대성산의 이마에 별 처럼 새겨 놓고

표표히 뒤돌아 서고 맙니다......

 

안녕!~~

내 젊은 날의 미이라여!~~

만곡(彎曲)된 우주의 이 언저리에서

나를 기약없이 기다려 준

나만의 시간이여!

사랑으로 가득찬 연인이여, 내 역사여!~~~

 

이제 내려갈 길을 조망해 봅니다.

 

남쪽에서 올라 오는 길은 제설이 잘 되어 있었는데

내려가는 길은 쌓인 눈이 발목을 덮어

등산화 속으로 들어 와서 얼음이 됩니다...

 

 

잘 가라는 인사인 듯

한 동안 세설(細雪:가는 눈)이 언덕을 넘어 와서

어깨를 가만히 안아 주며

오늘의 기쁨을 잊지 말자 다짐하고

가기 싫은 발길을 서서히 뒷걸음 쳐

언덕을 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 갑니다.

 

누구나가 지켜야하는 그 자리로!~~~

 

날머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이르자

등산화속의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됩니다.

 

둥지대장님!

 

추운데 사진 고맙습니다.

 

사단 전차중대로 나를 태우고 가던 그 부식물 수송 트럭은

삼거리라 불리는 작은 군사 교통기지에 내려 놓으며

여기서 부터는 혼자서 물어 물어 부대를 찾아 가라 이릅니다.

 

그런데 트럭에서 내려서자 마자

나는 쾌재를 부르고 말았으니

그 삼거리의 파라솔 아래서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헌병이 바로 나의 중학교 동창이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중대본부를 찾아온 나는

2~3일 후에 중대장에게 신고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 보다 1~2일 늦게 도착한 EMBC(일반탱크) 요원들과 함께 말입니다.

 

*: 나는 APC(장갑차요원: 탱크 보다 교육기간이 3~4주 짧음)

 

그런데 탱크병들 4명의 신고를 받고 난 다음

중대장은 내가 신고를 하러 팔을 올리려 하자

갑자기 "고만 됐어"하며 제 신고를 피해갑니다...

 

그 후로도 제 보직을 빨리 내어주지 않고 

사단 참모장실에 우리 전차중대에서 파견하게 되어 있는

직책을 나에게 물려 주려 고심하심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으나 

그 모든 일이 여의치 않아 

6월 말경의 무더위 속에

전방 부대와의 교체시기가 되어

나도 휴전선으로 향하는 소대를 따라

말고개를 넘어 적근산으로 향합니다.

 

중대장님의 성의는 말 할 수 없이 고마웠지만

휴전선에서 근무하는 경험을 쌓게 된다는 점에서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것 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소대는 적근산에 주둔해 있는 수색대와 내기시합도 하고

해질 무렵이면 수색대원들이 교대근무를 위해 철책선 앞에서

얼굴에 검뎅이 칠을 하고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으느라  

"고향의 봄"이라든가 "오빠 생각"이라 든가를

손에 손을 잡고 부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끝없는 생의 매직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습니다 .

 

그리곤 철책선 옆에 기다란 포신을 북쪽으로 향한 채

얕은 참호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탱크,

그 포신의 끝에는 김일성고지의 다른 목표물이

서로의 심장을 겨누며 숨을 겨누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장갑차는 철책선에서 100여M는 떨어져 있는 곳에

막사와 좁다란 연병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수색대원들이 준비해 둔 끼니를 챙겨 오거나 물품을 받아 오면 되니까

그나마 나은 셈입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에는

탁하사와 나는 60연대 초의 태풍 사라호  이재민들에게

집단촌을 조성하여 살게 한

심심유곡의 섬 같은 민통선 마을로

막걸리와 기타 물품들을 사러 내려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적근산 정상 철책선에서 내려다 본 155마일(250Km) 휴전선은

정말 너무 아깝고 비옥한 우리민족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한탄 섞인 비감만 안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남과 북의 정권이 서로 상대정권이나 그 후원자의 위험성을 앞세워

자기 정권만을 지켜 나가려는 획책을 그만 두고

진정 국익과 민족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대치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니 말입니다.

 

~~~~~~~~~~~~~~~~~~~~~~~~~~~~~``

8월 중순 어느 날 새벽

적근산의 우리 병영이 갑자기 수선스러워졌습니다.

벼란간 중대본부에서 전원 귀대하라 하기 때문입니다.

 

중대본부에 도착한 우리 소대원들과 일개 탱크소대는

그날 오후에 곧바로 같은 사단내의 다른 보병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밤으로 그곳에서 개인 용품을 완벽히 수령한 우리는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훈련에 참여하기 위하여

다음 날 새벽에 서울 여의도로 출발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로 막 떠나려던 그 순간

전차중대 본부에서 정**는 행사 훈련에 합류하지 말고

전차중대로 복귀하라는 전령이 도착했답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중대 본부로 복귀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8월 중순 부터 10월 1일 까지 계속되는

무더위와 훈련은 너무 고생스러우니 

그 고생으로 부터 좀 자유로워지라 하는 중대장님의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때에도 중대장님의 뜻은 고맙지만

군대에 기왕 입대했으니 고생이 되더라도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멋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국군날이 지날 무렵

나는 PX(부대내의 매점)병이 전역이 가까워 오니

PX를 맡아 운영해 보라는 중대장님의 분부가 있어서

그 당시에 모든 사병들이 부러워하던 PX를 맡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PX를 보면서 주인 잃은

강아지와 고양이 한마리씩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아지가 커 가자

보신탕을 좋아하던 병사들의 표적이 되었고

온 계곡을 따라 이 부대 저 부대를 쏘다니던 개는

결국 어디론지 떠나가서 영영 돌아 오지 않았고,

 

PX물품중에 과자류만을 골라 먹지도 않으면서

이것 저것 띁어 놓은 고양이는 혼을 좀 내 줬더니

내 곁에는 잘 오지 않고 내가 없을 때만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 와서

또 많은  과자류에 흠집을 내 놓아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는

어디선지 짝을 만나 내 혼자 잠을 자는 방의 천장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며칠을 두고 밤새도록 사랑 다툼을 하다가

이들 마저 어디론지 떠나가 버려 그 녀석들이 그리운 날도 있었답니다.

 

그리고 보병대대의 쫄병들 중 일부는

우리 부대와 맞닿은 싸리나무 울타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값싼 크림빵과 과자류 같은 것은 자기들이 사서 먹고

그래도 조금 고급에 속했던 백도 통조림과 깐포도등은

품에 꼬불쳐 넣어 분대장이나 자기 보다 상위병에게 주려고 사갑니다.

 

그리고선 또 PX바닥을 꼼꼼히 뒤져서

아무리 작은 담배 꽁초라도 찾으면 다 까 모아 합쳐서

그럴듯한 담배를 종이로 말아 피웁니다....

 

아!~~ 그들이 그렇게 만들어 피우는 순간의 행복에 젖은 그 표정!~~

그리고 그들의 얼어 터져서 갈라진 손등을 보는 이 마음!~~~

 

~~~~~~~~~~~~~~~~~~~~~~~~~

겨울이 지나고 몇달 후면 제대가 다가 오던 어느 날

나는 PX가 나에게 너무 맞지 않는다고 중대장님께 전하고

일반 하사에게 물려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대에서는 나에게 아무런 직책을 내리지 않아

휴가때 가져온 책을 읽기로 하고

일과 시간이 되면

나 혼자서 부대옆 대성산 계곡물이 흐르는 덤불속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헤밍웨이의 "Farewell To Arms"(무기여 잘 있거라)와

펄.S.벅의 "Letter From Pecking"(북경에서 온 편지)라는 소설을

영어사전을 펴가며 영어 공부 삼아 읽었습니다.

 

그간에 2명의 여자 친구(?)들로 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한명은 대학 입학동기 40명 중 단 한명의 여학생이었기에

씨암탉이라 불렸었는데,

이야기가 통하는 조금 가까운 사이여서 편지를 한 번 보냈더니

"Out Of Sight Out Of Mind!"(눈에 안보이니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글귀와 함께

결혼을 앞둔 여자의 고충을 생생히 들려주어

여자들의 또 하나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여학생은 내가 가정교사로 있던

대학교수댁 따님인데

나는 대학생, 그녀는 여고 졸업반의 학생으로 서로 좋아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

어느 눈내리던 겨울날 밤

나는 소롯히 내린 눈을 밟으며

전주의 옛철길을 따라 한없이 걷다가 집에 돌아와 있는데

나 보다 한참을 더 늦게 가정부와 함께 돌아 오는 그녀,

 

그녀는 말했었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오목대에 가신줄 알고 거기 갔더니 안계셔서

나중에라도 오면 보시라고 <선생님!~ XX이 여기 왔다 갑니다>라고

의자의 눈위에 써놓고 와요."

 

그랬던 그녀가 이제 편지에다가는 이렇게 보내왔습니다.

푸쉬킨의 祭日

<봄의 제일에 작은새 한 마리를 놓아주다,

,,,,,,,,,,중략

작은 미물에게도 자유를 주었으니

나의 마음은 한껏 평화로워지고

모든 불만이 사라지다......>

 

나의 청춘!

이렇게 하여 은하수 처럼 우주의 한편을 지키고 있거나

이렇게 하여 풀잎위의 벌레 처럼, 이름없는 들꽃 처럼

만신창이로 사라져가는 자신을 지켜보아야 하나니....

 

그래도 아름다워라

찾아 갈 수 없슴에 더욱 슬프도록 아름답고

알아 볼 수 없도록 변했어도 말없이 안아 주는 그대가 있어

해체되어 가던 내 인생 전부가

그토록 깨어나는 청춘으로 해서 더욱 아름다워라......

 

내 인생의 심장에

멈추지 않을 바람......

그것은 곧 내 청춘의 기운을 실어 나르는

영원한 날개짓, 바람개비 사랑이라네...

~~~~~~~~~~~~~~~~~~~~~~~~~~

나의 청춘을 보냈던 대성산!

언제나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그 산야, 그 시절의 사연들!~~~

 

비록 다시 그 시절로 돌아 가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속을 더듬으며

대성산과 긴 옛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

이 보다 더 기쁠 수가 어디 있으랴

 

 

註: 오목대: 전주의 한옥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공원으로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의 황산벌(지금의 운봉)에서

               왜구 소년 장수 아지발도를 물리치고 올라 오다가

               이 오목대에 올라서 전주시내를 내려다 보며 훗날의 자기 포부가 담긴

               한 수의 시를 지었다 해서 유명하며,

               내 대학시절 나는 그 아래 한옥마을과 이성계 선조가 모서져 있는

               경기전과 이웃한 풍남동 은행나무 골목에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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