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60만 양봉 대군을 거느린 나는
전주 근처를 지나면서
카스테레오에서 울려 퍼지는 뉴스를 들었다.
계엄선포로 광주가 봉쇄 되어
일체의 출입이 통제 되었단다.
나는 정읍과 고창 흥덕을 통과하여
내소사 까지 가면 되니
바로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의
옆을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양봉은 1통에 약 2만 마리 씩의 군대로 이루어져 있으니
불과 30개의 벌통속에
60여만 마리가 밀집되어 있는 압축 군대인 셈이다.
이 나의 군대와 전두환의 계엄군이
조우를 하지 않은 것 만도 다행(?)이면 다행이었다.
ㅠㅠㅠㅠㅠㅠㅠ
부안군 상서면 ...
곰소항과 내소사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보건소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던
작은 누나가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고 ...
그때 고1학년이던 내가
처음으로 땅을 밟은 적이 있었던 곳이다....
눈물에 가려
아득하기만 했던 고장...
이곳의 유채꽃 꿀을 보러 온 것이다.
이곳에 온지 사흘 쯤이 흘렀다.
이때 였다.
*동명*이란 승려와 마주한 것은...
파리하고 깡마르고 여린
한 승려가
빙긋히 입가에 미소만 띈 채로
내가 벌통을 손질하는 옆에 와서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며칠을 두고 구경만하고 가기에
나는 그가 벙어리 인줄 알았다.
그러나
4~5일 지난 후에 그는 말을 걸어 왔다.
100일 동안의 묵언(默言)기간 이란다.
100일 동안을 말 없이 지내기로 작정하고
말을 안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수행의 일부란다.
나와 그는 동년배로서
또 고향도 같은 전주였고
내가 어머니 나뭇단을 받으러 마중 나갔었던
아중리 수리조합 저수지 근처라니...
그는 가난을 피해서
후에 조계종 총무원장 까지 역임했던
해안 스님의 행자승으로 입산하게 되었단다.
그와 나는
해안스님의 유품들이 보관된 별채에서
한달여를
같이 자기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지냈다.
그는 큰 스님이 되기 위해
욕정을 이기려고
나무 그루터기 위에
자기의 남성을 올려 놓고
도끼로 잘랐단다.
이그
모든 것이 마음에 있을 터인데도...
하기야 그땐
아직 어려서 였을 테지만...
어느 날
그와 나는 직소 폭포를 지나
봉래구곡(지금은 작은 댐이 건설되어 있슴)의 골짜기를
따라서
격포와 변산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낮에 출발했는데도 밤이 되었다.
초여름이어서
해수욕장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까까머리 스님과 나는
어느 허술한 민박집에 거처를 정하고
해변의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그 민박집을 임대하여 운영하는 사람은
내가 가정교사를 하던 예식장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동생벌 청년이었다.
이른 아침
그와 나는 상쾌한 해변의 공기속에
모래밭 위를 걸어 한없이 걷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민박집 운영하는 녀석이
손에 무엇인가 긴 해물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선생님 드리려고 사오는 거예요...
제가 요리할테니 좀 잡숴보세요..*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낙지였다.
물론 스님은 안좋아할 지 모르나
나는 너무 기뻐서 감동했다.
녀석의 보석 같은 마음이
내 가슴속에서 빛으로 부숴져내렸다.
그후로 5~6년이 흐른 뒤였다.
그와 나는 또 우연히
서울의 길에서 마주쳤다.
그는 이제 서울 성북동의 전등사 주지라는 직함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부모님과 누나들의 불공을
그에게 부탁했고
그해 백중 날에
나는 그가 집전하는 불교 제례의식의
한 참석자가 되어서
성숙해진 그의 앞날을
은연 중에 축원하고 있었다.
당뇨병으로 시달린다는 그가
왠지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지금은 또
어떤 모습으로
자기의 길을 지켜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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